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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던전월드 - 세계를 구하나?

나토르는 뺨을 긁적거렸다.

"당혹스럽구만."

그는 자신이 느낀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의뢰를 위해 도둑 길드를 찾아온 두 사람에게서 느껴지는 풋풋함- 그러니까 어설픔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내세운 목표는 너무나 거창했다.

"세계를 멸망시킬 보물을 찾는다라."

그는 피식 웃어보이고는 말했다.

"믿을 걸 믿으래야지."


그 말에 쌀쌀하게 대답한 것은 그를 찾아온 2인방 중 한사람, 짜리몽땅한 소년이었다.

"솔직하게 말하라 해서 말한 겁니다. 이 편이 확실하게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 듣기도 했고."

나토르는 웃어 넘기고 싶었지만, 소년이 가지고 온 '마도사 협회 소개장'과 곁에 선 거대한 검을 멘 여검사의 존재 때문에 "큼큼!" 이라며 어설프게 목을 가다듬을 수밖에 없었다.

'생각해보면 마도사와 얽혀 있는 일이 작았던 적은 없었지. ...도둑 길드에서 굳이 이 몸에게 이 녀석들을 배정한 것도 그렇고.'

그는 2인방을 위 아래로 훑었다. 소년과 처녀는 대놓고 싫은 티를 냈지만, 그는 그런 사실은 전혀 고려치 않았다.

'그렇다면 드물게 찾아오는 대박?'

나토르는 턱을 쓰다듬곤 사람좋은 웃음을 보이며 말했다.

"조오았어. 이 나토르 님께서, 너희들의 의뢰를 받아들여 주지. 잠깐만 기다려. 준비 좀 하고 말이야."


처녀는 창밖으로 멀어지는 나토르를 확인하곤 짧막하게 이야기했다.

"...도둑놈과 함께 하는 거, 정말 다시 생각해볼 수 없어?"

소년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어쩔 수 없어요. 당신이나 저나 '뒷세계'의 일에는 젬병이고, 무엇보다 함정같은 걸 전문적으로 담당할 수 있는 사람이 있어야 하니까요."

"그걸 떠나서 말야. 그 실력조차 없어 보이는데?"

소년은 다시 한 번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말했다.

"못미더운 건 나도 마찬가지지만. 마도사 협회의 'C급 소개장'만으로 도적길드의 수준 높은 도적에게 의뢰를 할 수 있을 리 만무하니까요. 그렇다고 저희가 엄청난 보상을 지급하거나, 그렇다고 찾아낸 보물을 나중에 따로 분배해 줄 것도 아니니 저런 얼치기와 함께 할 수밖에 없는 거죠."

그렇게 말한 소년은 크게 한 숨을 내쉬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없는 것보단 도움이 될 겁니다. 예를 들어 당신처럼 말이죠."

"...또 맞을려고."

처녀의 치켜든 주먹에 소년은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때린다면 정말로 때리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러고보니 말야."

마을 입구에서 다시 만난 나토르는 마법 베낭을 짊어진 상태였다. 판초로 교묘하게 가린 그의 품 속에는 언뜻언뜻 나이프의 자루를 확인할 수 있었고, 조금 전까지는 맡을 수 없었던 묘한 단내도 풍겼다.

'그래도 필요한 물품은 제대로 준비했나 보네.'

도적과 함께 하는 것 자체를 꺼렸던 '클레어'지만, 도적이 가진 능력들이 모험에 있어 여러모로 도움이 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 자신부터가 저 단내의 정체인 '황금근'에 호되게 당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직까지 우리 서로를 소개하지도 않았잖아?"

능글맞은 나토르의 눈빛에 질색하던 클레어는 문득 그가 둘러멘 반다나가 유달리 눈에 익숙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잠깐만, 당신."

"응? 왜 그러지 아가씨? 혹시 멋진 이 '나토르'님의 모습에 반하기라도 한 건가?"

뿌드득!

소년은 자신의 귀에 들려온 마찰음의 정체를 파악하기도 전에 '뻑!' 하는 소리와 함께 어딘가로 뜅겨 날아가는 나토르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귀청이 울릴 정도의 큰소리로 소리를 치는 클레어의 모습도.

"그 느끼한 목소리, 역시 너구나!"

소년은 그 모습을 얼을 빼놓고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클레어의 지갑을 지난 달 저 사람이 털어갔다는 거죠?"

"그렇다니까! 그 고생을 해서 모은 쌈지주머니를!"

클레어는 다시 주먹을 휘두를 기세였지만, 이미 멀찍히 떨어져 있던 나토르는 순간 움찔했을 뿐 함께 소리를 질렀다.

"증거있어? 설사 내가 가져갔더라도 앞뒤 없이 그렇게 사람을 패나? 이 아가씨 조만간에 사람잡겠네!"

"뭐라고? 이 도둑놈이! 내가 증인이다 짜샤!"

"...에휴."

두 사람의 소란을 지켜보던 소년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도둑 길드'가 있는 마을의 특성상 입구를 지키던 경비병이 일일히 달려들진 않았지만 더 이상 일정이 지체되는 것은 사양하고 싶었다. 소년은 짐을 짊어진 후 말했다.

"두 사람이서 실컷 싸우세요. 일단 저는 '라벨' 마을로 먼저 가겠습니다."

"어, 꼬마 혼자 가면 위험하다니까! 누나랑 같이 가야지!"

"그 때도 말했었지만, 클레어의 도움은 오지랖인 경우가 많아요. ...애초에 혼자서도 잘 여행했었는데."

소년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어가기 시작하자 서둘러 클레어가 그를 따라나섰다.


어느 새 해는 뉘엿뉘엿 지고 있었고, 그들이 목표로 하였던 라벨 마을이 저 너머에 보이기 시작했다.

"요쿠바입니다."

"응?"

길을 걷는 동안 아무말도 하지 않던 요쿠바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좀 전 하지 못했던 자기 소개말입니다. 마법사고, 상아탑층에서 왔습니다."

그러자 그들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따라오던 나토르가 퍼렇게 멍이든 눈가를 문지르며 말했다.

"잘도 기억하고 있었네. 그럼 나도 정식으로 내 소개를 해야겠지. 나토르. 직업은 낭만적인 밤의 신사."

클레어는 콧방귀를 뀌었다. 이곳까지 오면서 이젠 대꾸도 하기 싫다는 태도였다. 하지만 그녀를 빤히 쳐다보는 요쿠바의 눈빛에 그녀 역시 자신의 소개를 하였다.

"클레어. 전사. 좋아하는 건 단 음식. 싫어하는 건 나쁜 놈들. 참고로 도둑놈은 나쁜 놈들에 포함되는 개념이지."

두 사람은 다시 으르렁거렸지만 요쿠바는 그들에게 돌아서서 말했다.

"서로가 마음에 들 수도 있고, 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사이좋게 지내라는 말같은 거. 이야기하지 않을게요. 어차피 대충 되는대로 꾸린 일행이고, 모든 게 만족스러울 순 없는 노릇이니까요."

그는 두 사람을 번갈아본 후 말을 이었다.

"하지만 저희에겐 공동의 목표라는 게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선 서로 어느 정도 양보할 필요도 있겠죠."

클레어는 눈만 꿈뻑꿈뻑했고, 나토르는 살짝 지겨운 티를 내고 있었다. 그의 표정에는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놈한테 설교듣기는 싫다'는 기색이 노골적으로 드러나고 있었다.

"이왕 시작되었으니, 최대한 잘 마무리할 수 있도록 해 보자고요. 어줍잖게 시작된 이야기가 결말도 없이 흐지부지되는 게 질색인 건 저뿐만은 아닐테니까요."